Unwind Yoga KLUB
<PILLARS OF WELLBEING,
조건 없는 행복을 위한 훈련, 요가와 명상>
언와인드 요가 클럽 뉴스레터 / vol.11 / DEC.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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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은 우리의 희망에 따르지 않고 제 나름의 진행 과정을 따를 뿐이다. 그것들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무익하다.'
- 파욱 사야도 지-
저는 요가를 안내하기 이전에 읽고, 쓰던 사람이었습니다. 첫 번째 직장에서 쓰는 일을 시작했는데, 그다음 직장에서도, 그다음 직장에서도 저는 쓰고 있었습니다. 에디터라는 직군을 벗어나서도 마케터, 컨벤션 기획자, PR 등 분명 다른 직군이었는데, 무엇을 쓸 일만 생기면 저에게 그 일이 이미 와 있었죠. 돌아보니 제가 만든 조건이었습니다. 그 조건이 주홍 글씨처럼 너무 강력하게 쌓여서 저는 아무리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죠. 이제 와 보니 벗어나려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만들어진 원인은 제 희망과 관계없이 자신의 진행 과정을 따르고 결과를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쌓은 원인들을 저항 없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전히 읽고 쓰고 있습니다. 다만 예전에는 '나'보다는 외부의 것들을 읽고 관찰하며 썼다면, 요가 명상 수련을 하는 지금은 '나'를 읽고 쓰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조금 다른 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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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는 그동안 쌓아온 요가 명상 수행의 조건(원인) 들과 과정, 지금 쌓아가고 있는 원인들, 하타요가라는 원인으로 만나게 된 삶과 수련의 변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조건들이 쌓여가고 있나요? 돌이켜보니 어떤 결과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원인을 채우면 됩니다. 그간의 원인으로 생긴 결과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는 요가와 명상으로 인해 길러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평화로운 상태로 살아갈 수 있겠죠. 대부분은 자신이 쌓은 조건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세상과 타인을 원망하며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글의 시작에 언급했던 '파욱 사야도 지'의 말처럼 좋은 원인이든 나쁜 원인이든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니 부디 결과로 원하는 좋은 원인들을 성숙시켜가는 나날이기를 바랍니다.
<언와인드요가클럽 발행인 김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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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기도 하고, 그 간의 길었던 요가 명상 수련 또한 어떤 조건들을 쌓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반조(反照) 해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요가 수련 종류와 명상법들이 있습니다. 아픈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업무로 쌓인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처음 접한 요가는 20대에 동네 헬스클럽에서 하는 힐링 요가였고, 그다음 해에는 전문 요가원에 가서 빈야사, 지바묵띠, 포레스트 등 다양한 현대 요가를 거쳐 모든 요가의 시초이자 뼈대인 하타 요가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질적이고 담백한 수련법을 가장 나중에 찾게 되었습니다. 본질적이고 담백한 것은 세속에서는 어렵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고,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나 자극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초보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접근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도 음악을 틀어주는 요가, 발리, 밴쿠버 등의 이국적이고 모던한 자극들이 끌려서 돌아다니던 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들은 모두 저에게 필요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저에게는 요가 안에서의 원인이 되어준 감사한 시간들입니다.
명상 또한 20대 시절 템플스테이에서 처음 접했는데, 그때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니까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는 서구화된 현대 명상법들을 만났습니다. 요가원에서 하던 마음 챙김 명상법이었는데, 아마 mbsr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훈련시키는 수행법으로 요가와 명상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불교 명상과 요가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간화선, 하트 스마일 명상, 차크라 명상, 무드라 명상, 싱잉볼 명상, 차 명상 등등 다양한 명상법들을 배우고 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명상법을 만나지 못하다가 결국 몇 해 전 감사한 지인분의 추천으로 초기불교와 인연이 닿아 지금은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마타(선정, samatha)의 40가지 선정 수행 주제 중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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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ana)는 들숨, 빠나(pana)는 날숨, 사띠(sati)는 잊지 않고 기억함, 마음 챙김을 뜻합니다. 아나빠나사띠는 들숨날숨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며 항상 챙기는 수행입니다. 역시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순수한 숨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척이나 심심해서 마음의 집중을 잡아두기가 힘들기 때문에 다양하게 변형된 현대 명상법들이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명상의 뿌리와 뼈대인 붓다가 했던 사마타 위빠사나 명상법은 역시나 담백하고 단순하지만, 사실 숨만 바라보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만큼의 집중력을 만들어 내기가 어렵습니다. 요즘은 영화관에서도 흥미롭지 않은 장면이 나오면 금방 잠에 빠지거나 휴대폰을 켜는 분들이 많던데, 너무 크고 자극적인 외부의 것들을 보고 사는 현대인들이 보이지도 않는 숨을 작은 코 끝 부위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높은 장벽일 것입니다.
미얀마의 파욱 명상센터는 아비담바와 남방불교 부동의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을 수행매뉴얼로 삼아 선정과 지혜를 수행하는 곳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사라진 초기불교 수행법인 사마타(선정)수행을 기초로 하여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배우기 위해 미얀마로 떠나셨던 스님들이 왜곡되지 않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수행하고 돌아와 선원을 세워 초기불교 수행법을 전하고 계신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운이 좋아 바로 부처님의 정법 수행을 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저는 여러 조건들을 쌓은 결과로 마지막에 만났습니다. 지금의 시기 또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집중력을 계발하는 아나빠나 사띠는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으로 여기에서도 거쳐야 할 단계가 많고, 아나빠나사띠로 색계 선정을 확립한 뒤 위빠사나로 전환하고 매우 체계적으로, 단계별로 수행을 이어가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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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씨앗이고, 하타 요가는 밭이며, 욕심을 놓아 버린 것은 물이다. 이 세 가지에 의해서 초월적인 운마니 상태이며 모든 소원을 들어 주는 나무인 칼파브리크샤의 싹이 튼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4.104-
하타요가는 마음이라는 씨앗에 싹을 틔우고 다스리기 위해 반드시 갈아야 할 밭과 같은 것입니다.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 마음 수행으로 나아가는 기초를 다지는 과정입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조건에 따라 씨앗에 싹이 트고 자라나고, 다음 단계의 수행으로 나아갈 인연이 찾아옵니다. 저는 매일 꾸준히 하타요가를 하며 삶과 일상에서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깊은 명상 수행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가꿔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쌓여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요가와 명상을 접했기에 하타요가를 만났고, 하타요가로 꾸준히 육체를 묶고 다스리고 훈련하며 쌓아온 시간들과 원인들이 있기에 또 다음 단계로 만나진 수행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과정에 감사함을 느끼며, 계속해서 지금 주어진 수련에 집중합니다. 원인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는데 의심과 변덕으로 다른 것이 좋아보여서, 혹은 빨리 가고 싶어서 넘어가는 것은 반드시 불만족과 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수련을 꾸준히 하십시오. 스스로의 때는 찾아오면 알게 됩니다.
얼마 전,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옆 테이블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는데, 템플스테이 체험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연말을 맞아 친구들에게 함부로 내뱉은 부정적인 말들과 거친 행동으로 인해 더럽혀진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저녁에 편의점에 가고 싶은 마음을 못 이기고 몰래 탈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여기까지 와서 그냥 자는 게 너무 아까웠고 술을 마시고 싶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많은 스님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놀러 가는 마음으로 힐링하러 가볍게 왔는데 밤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싫었던 모양입니다. 옛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저도 20대에는 템플스테이가 끝나면 늘 친구들과 술을 마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혼자 절에 템플스테이를 하러 오는 20대의 철없던 저에게도 마음과 시간을 내어 차도 따로 내어주시며, 미얀마에 부정관 수행을 하러 다녀온 이야기, 출가하게 된 이야기들을 나누어주시고, 스님들만 하는 명상 시간에도 불러내서 가르쳐 주시고, 퇴소하는 길에는 자신들도 시내에 가는 길이라며 함께 산길을 걸어주시고 버스 정류장까지 해주시던 존중과 친절이 참 좋았습니다. 십여 년이 지나 그렇게 시작된 조건들이 쌓여 제가 수행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고 맑은 것을 사모하며 지금에까지 온 것을 보면서 그 친구들도 좋은 인연의 씨앗들을 많이 심어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요가, 명상 수행을 이어가면 좋겠다는 바램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삶의 노폐물들을 정화하고, 마음의 밭을 잘 가꾸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냈습니다. 그 친구들도 '마음 수행'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음 수행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대중화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했습니다. 대중들의 수준이 이렇게까지 높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요가, 명상 수행은 종교적 수행의 측면에서는 진리의 통찰, 신과의 합일, 해탈이라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저도 어느 정도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요가와 명상을 하면 안정감과 편안함, 집중력과 주의력의 개선 등으로 육체적, 심리적으로 이완되고 평화로워지는 것 때문에 시작했으니까요. 십 년 전에 읽었던 <요가 수트라>와 지금 읽는 <요가 수트라>는 제 인식 속에서 전혀 다릅니다. 경전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조건들에 따라 제가 변했기 때문이죠.
이제 막 요가 명상 수련에 발을 들인 입문자, 즉 생활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방황하는 마음을 안정시켜 내면에 주의를 두는 훈련을 통해, 편견 없이 자유롭고 신선하게 사물을 볼 수 있고, 건강한 몸과 건강한 생각, 건강한 삶의 방식을 지향한다는 상대적인 의미로 여기는 것이 좋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시작했고, 실제로 현대에서 요가나 명상은 심리학 의학적으로 웰빙, 웰니스로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템플스테이가 종교와 상관없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입니다. 각자의 조건과 단계에 따라서 스트레스 해소, 정신적 건강, 육체의 건강 등 웰니스로 여길 수도 있고, 조금 더 깊은 의미로 여길 수도 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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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행자에게 내면의 소리인 나다는 마음이라는 마굿간을 잠그게 하는 빗장 역할을 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나다를 계속해서 해야 한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4.95-
몇 해 전 아나빠나사띠를 수행하기 위해 처음 선원에 갔을 때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욕망의 세계인 세속에서 길들여진 습관대로 애써서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단 며칠 만에 선정에 들고 싶다는 탐욕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다음에 갔을 때도 역시 수행을 괴롭히는 일들이 나타나 제 안에 들어있던 성냄과 탐냄, 어리석음과 번뇌들을 보게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집중 수행에 갔을 때는 요가가 너무 하고 싶고, 달리기, 산에 가기 등의 일상생활이 그리워져서 수행하는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단 며칠 만 수행하면 되고, 나가면 또다시 일상을 되찾을 텐데, 육체의 건강을 잃을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 만들어놓은 규칙적인 일상에 집착하는 마음 같은 어리석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의 일상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일상, 건강한 육체, 또한 영원하지 않고 언제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다시 한번 놓아주고 지금을 살 수 있는 알아차림의 기회였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의 요가 수련과 일상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현재에 대해 거머쥐고자 하는 어리석음, 미래의 변화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아나빠나사띠 수행에 온전히 기쁘게 몰입할 수 있었을 테죠. 삶과 수행 역시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인데, 지금 잠깐 평온하다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심인 것이죠. 어리석게도 조건적인 행복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놓아주고, 조건 없는 행복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하타 요가 수련 또한 경쟁과 욕심으로 하기보다는 바른 정진력으로 자신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수련의 본질을 향해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겠다는 다짐도. 세상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왜 요가를 시작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원인을 쌓아왔는지를 잊지 않고 초심을 되새겨보게 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을 떠나 집중 수행을 갈 때마다 내 안의 '저항'이라는 커다란 괴물을 마주하고 놓아주기 위한 교훈을 얻고 돌아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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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지만 않는다면 더 빨리 내려놓을 수도 있겠지요. 어리석음과 고집 센 마음은 쉽사리 놓아주려 하지 않지만요. 기존에 자신이 알고, 믿고,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이별하는 것은 눈물이 날 만큼 슬픈 일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고, 한계를 인정하기 싫고, 고정되어 있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만듭니다. 그 고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놓아주고 나면 참 허무합니다. 평생 이 마음에게 지고 끌려다니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니요. 한 번 헤어지는 게 어렵지 마음을 알아차리고 흘려보내주기 시작하면 이별의 속도는 점점 가속도가 붙습니다.
우리가 지금 행복이라고 믿고 있는 조건들은 무엇인가요?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어서 몰랐던 것들, 혹은 집착하고 있던 것들은 저처럼 잃어버릴 것 같은 순간이 와야만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요가원을 하고 있을 때에도 교훈처럼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그 집착의 강도를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그것을 앗아간 이에 대한 성냄이 올라왔었죠.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불행의 조건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행복의 조건을 앗아간 사람에 대한 분노,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번져가는 그 불같은 집착을 보게 되고 그것에 사로잡혀있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생생하게 알게 되니 요가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집착,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친밀함이라는 집착을 놓아버리게 했습니다. 나를 지금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도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언젠가는 모두 사라집니다. 지금의 시절 인연도, 지금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도요. 그래야만 지금 그것을 집착 없이 불안 없이 충분히 즐기고 또 떠날 때가 되면 기쁘게 보내고 다가올 더 큰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욕망은 이 세상에서 너무 보편적이어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을 잃게 되면 고통이라는 독을 느끼게 됩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친밀함에 대한 욕망, 돈을 많이 갖고 싶다는 욕망,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 직장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등 이런 것들은 마치 세상에 태어나면 모두가 무한 경쟁 속에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욕망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런 욕망들은 가지고 나면 만족을 모르고 더 쥐려고 합니다.
저 또한 이 신기루 같은 것을 쥐려고 괴로움에 시달렸고, 가지고, 잃고, 끝없는 고통을 반복했습니다.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고, 주변에서도 이것 때문에 내는 성냄에 대해 너무 당연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영성을 다루는 책들에서는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저항하지 말고 흘려보내라. 에고(ego)는 밀쳐내거나 끌어당긴다. 즉 싫어하거나 좋아한다. 고통은 있지만 받아들여라. 그러면 행복해진다.’마이클 싱어나 에크하르트 툴레 등 영성가로 유명한 분들은 현생이나 전생에 원인을 충분히 쌓거나 큰 계기로 인해 요가와 명상을 접하고 바로 깨달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 나도 해탈하고 싶어. 지금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이런 책들만 읽고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이라는 원인도 쌓지 않고 바로 지혜 수행을 통해서 고통을 소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충분한 원인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원인을 쌓아가야 합니다. ‘갑자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저도 전에는 오랜 시간 성공한 사람들이 쓴 이런 책들만 반복해서 읽으며 현실에서는 수행을 게을리하고 다시 감각적 욕망을 즐기며 살아가면서 생각으로만 ‘나도 언젠가는 해탈할 거야. 나는 이만큼 하는데 왜 아직도?’라고 어리석은 생각과 성냄만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원인과 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행의 속도도 다르고 때도 다릅니다. 그때도 억울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나를 앞서가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수행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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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하러 가서 예불 시간마다 외우던 ‘반야바라밀다심경’에는 심무가애, 무유공포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어서라는 뜻입니다.
회복탄력성의 중요성을 말하는 김주환 교수가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로 회복탄력성을 잘 담아낸 문장이라며 ‘심무가애, 무유공포’를 언급했던 강의가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말합니다.
김주환 교수는 강의에서 이 부분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만약 행복에 조건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에 조건이 충족되어서 얻어지는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동전의 양면과 같은 불행의 조건입니다. 어떤 조건의 충족으로 인한 행복은 잠재적 불행입니다.’ 그 이유는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돈, 권력, 지위, 명예, 성공, 사회적 평판, 외모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늘 못 가질까 봐 두렵고,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려면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면 행복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고통은 있지만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회복탄령성의 핵심입니다. 지금 나에게 벌어진 일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우리의 에고는 밀쳐내거나 끌어당기죠. 즉, 싫어하거나 좋아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집착일 때 더욱더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미묘한 소리를 감지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자극적이고 현란한 정보의 홍수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멍하게 불안하고 긴장한 몸으로 내면의 소리를 회피하며 클릭해대는 숏 컨텐츠들이 과연 내 인생에 얼마나 상관이 있을까요? 가벼운 농담들과 타인들의 쓸떼없는 가십,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들, 이념의 노예로 만들려는 말들은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지 못할 때 도망치기 딱 좋은 곳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알아차리고 외부로 향하려는 유혹적인 마음을 강제로 내부로 향하게 하고 자신의 내면에 항상 몰입하려는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가지는 사람만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온전한 '나'를 되찾아 '나'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입니다. 끊임없이 외부의 기준을 염탐하며 거기에 자신을 맞추어 보여주려고 애쓰며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무한 경쟁에 뛰어들거나, 근원의 뿌리를 자신 안에서 찾아 기준을 자신에게 두고 믿으며 살아가거나.
요가와 명상은 끊임없이 외부로 질주하는 우리의 마음과 귀를 내부로 향하게 하는 훈련법입니다. 요가 수련자들이 매일 반복적으로 이 훈련을 하다 보면 내면의 소리가 미묘하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침묵과 인내, 고독을 즐기며 나아간다면 내 안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무시하지 않고 관조하며 응시하기 시작한다면 그 목소리가 유일한 자신 삶의 안내자임을 알게 되고, 두려움 없이 그 목소리를 따라 독창적인 삶을 창조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삶을 원한다면, 아직 수련이 덜 된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로 흘러들어가려는 유혹을 알아차리며 절제하고 부족함을 인정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내년에도 성장과 진실을 향해 가고자 한다면 배움의 고통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조건 없이 행복하시기를! Shanti!
‘배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무엇이 진실인가를 아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에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한계를 이해하십시오. 그럴 때만 당신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조 우티카 사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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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듯 가볍게_정우성 지음>
요즘 배우 정우성이 말 한마디 없이 눈빛으로 낭만을 연기하던데, 작가 정우성은 글로 낭만을 만들어냅니다.
글을 따라 숨을 쉬게 되고, 묵묵히 몸에 집중해 보게 되고, 천천히 호흡하며 읽는 내내 '지금'을 느끼게 되고 여유가 생겨납니다. 클리셰적인 서사나 상기된 선동도 없고, 직접적으로 슬픔을 묘사한 문장도 없는데 푸른 숲이 떠오르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합니다. 담담하고 따뜻한데 그 안에 자리한 우리의 묵직한 삶에 대한 공감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성찰과 실패를 통해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내 스스로의 삶을 일으키려는 힘이 느껴집니다. 20대, 30대의 설렘, 화려함과 우울함에 대해 깊게 공감할 수 있었고, 다르게 살아보려는 시도, 건강한 조건들을 성숙시키며 자신의 삶을 가꿔가는 모습을 보며 ‘이 작가 분명 나이가 들수록 더 멋지게 살아가겠구나.’ 기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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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내 마음에 들고 싶어서_글, 그림 버들>
일단 제목부터 마음에 듭니다.
누군가가 아닌 내 맘에 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합니다. 요가 명상 수련을 통해 잘 들여다보고 자기 관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물을 주고 성장하려는 시도들, 그 안에 들어있는 솔직한 성공과 실패의 입체적인 면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위안이 됩니다.
소소한 일상, 그 안에서의 부딪힘, 따뜻함, 자신에 대해 이해한 만큼 확장되는 타인에 대한 이해, 이어서 세상으로 이어지는 연민과 사랑...
작가의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짧은 글들이 적혀 있어 연말에 편안하게 읽기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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