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오아시스 같은 시간, 자유롭게 좋아하는 소재로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오랜만에 맞은 내면의 여유로 행여나 안 보일세라 정성스럽게 펜을 꾹꾹 눌러쓰듯이 소중하게 자판을 꾹꾹 눌러 음미하며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많은 변화 속에 놓여 있었던 몇 달이었습니다.
최근 저에게 가장 큰 이슈는 '감사', '협력과 우정'이었습니다.
오랜만에 펼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에 담긴 '나에게 던진 질문'이 다정하고도 따끔한 성찰을 전해줍니다. 그저 살아내기도 녹록치 않은 삶에 계속해서 던지는 생생한 질문들. 어쩌면 두려워서 피하고 싶었던 질문들. 우리 삶에 시가 필요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필연적으로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서만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우리는 불평불만이 더 쉽고, 감사는 어려운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경계는 쉽고, 협력은 어려운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지혜롭고 유연한 마음가짐으로 모두에게서 감사함을 찾아내는 삶의 방식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요. 스스로 먼저 감사하고 누군가에게 손 내밀고, 먼저 협력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감사와 협력에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배신당할까봐 두렵고, 피해 입을까봐 두렵고, 경쟁에서 질까지 두려운 우리가 과연 서로에게 협력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호혜적인 이타주의와 장기적인 협력에 과연 꼭 서로 간의 우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섬세하게 다루지 않으면 쉽게 깨지거나 질투, 소유욕, 미움으로 변질되기 쉬운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우정이나 사랑으로 협력 관계를 만드는 것보다는 더 장기적으로 지혜롭고 담백하게 호혜적인 이타주의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요? 그런 질문이 내면에 묵직하게 있었습니다.
특히 함께 협력을 하며 일을 해나가야 하는 관계에서는 반드시 답을 찾아야만 하는 깊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순수 이타주의만으로는 성장이 없었습니다. 상대는 협력하지 않는데 계속해서 혼자 끊임없이 베풀고 참는다고 상대가 알아주거나 협력이 진화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관계는 퇴보합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친구에게 계속해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관계는 서로에게 발전이 있을까요? 계속 이용만하고 협력은 진화하지 않는다면요? 그 관계가 결과적으로 계속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을까요?
그러던 중,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때도 비슷한 일로 고민했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 우연히 무척 사랑하는 작가 테드창의 원작으로 만든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택트>를 보았고, 이어서 영감을 받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연이어 보고 읽으며, 마음을 정돈하고 꼬인 매듭을 풀어갔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영화 <컨택트>(영문 원제인 ‘Arrival’)에서 갑자기 지구에 찾아온 외계인들의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 지구인은 외계인을 방문합니다.
외계인들은 18시간마다 한 번씩 UFO(이하 ‘쉘’)의 입구를 열어 그들의 방문을 허합니다. 지구인과 외계인은 차단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대화를 이어갑니다.
지구인이 묻습니다.
왜 이 곳에 왔나요?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나요?
어디서 왔나요?
무엇을 원하죠?
영어로, 중국어로, 러시아어로, 일본어로, 지구인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만 대답은 없습니다.
투명한 차단 벽을 사이에 둔 지구인과 외계인,
낯선 이들끼리의 반복되는 조우, 그들은 과연 서로를 신뢰할 것인가? 배신할 것인가? 각각 어떤 이가 협력 카드를 낼까, 어떤 이가 배신 카드를 낼까?
마주 본 사이에 긴장이 감돌고, 소리 없이 숨을 죽이며 보는 관객에게 영화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협력과 배신 중, 신뢰와 불신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