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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통해 바른 이익을 얻고 계신가요?>
언와인드 요가 클럽 뉴스레터 / vol.14 / OCT.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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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통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여과없이 통과시키는 한 작가가 있습니다. 용기있게 고통을 정면으로 감뇌하느라 수척해진 얼굴 속에는 삶과 세계의 고통과 진실을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가늘지만 질긴 희망과 낙관, 강인한 힘이 서려있습니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수상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작가의 가느다란 움직임과 끈기있는 희망이 만들어낸 커다란 결과를 보면서 최근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요가라는 수행과 작가의 글쓰기에는 꽤나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도에서 요가가 생겨나게 된 뿌리 또한 삶이 고통이라는 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고 가느다란 희망을 쥐고 강인하게 나아가고 있는 지, 삶이 고통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말랑한 즐거움과 쾌락적 도피 안에 숨어 작은 아사나의 성공만으로 기쁨과 절망 사이를 오가고 있는 지, 다소 불편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가끔은 각성이 필요한 이야기들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저에게도 요가를 하면서 늘 과제였던 부분입니다. 처음 시작은 그 뿌리를 몰랐습니다. 요가를 운동이 아닌 삶으로 받아들이고부터는 서서히 저를 통해 통과시키고 있는 묵직한 진실입니다.
뿌리를 알고 나면 요가는 하나의 취미로 여기기가 어렵고, 삶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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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이 요즘 장안의 화제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 종로에는 현수막도 걸렸습니다. '상이 뭐 대단한건가, 인내한 작업의 세월이 대단한거지' 하다가도, 한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사랑하고 지지하던 한 사람으로써 깊은 감동과 기쁨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한강 작가의 지난 인터뷰 영상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잔인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걸어들어가 자신을 통해 통과시킨 사람의 얼굴, 장례식장에서 볼 법한 검은색 차림과 슬픔에 잠긴 얼굴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가만히 바라보니 작가는 늘 무언가를 애도하는 사람의 태도와 차림과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겪지 않은 타인의 고통마저도 굳이 직면하고 공감하기를 자처하며 자신을 헌신해 기꺼이 통과시킨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타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탈 수 있단 말인가.
자격이라는 것은 그렇게 언젠가는 당사자를 스스로 찾아가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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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삶에 대한 허황되고 과장된 기대와 희망보다는 가느다랗고 긴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저 고통의 밑바닥에서도 가느다랗고 질기게 생명의 끈과 존엄과 희망을 놓지 않는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진실을 바라보기를 꺼려하는 사이, 피하고 싶은 폭력과 고통의 중심 자리를 기꺼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맞서 싸우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듯 보이던 작가는 어느새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고 노벨문학상의 쾌거까지 이루었습니다.
죽음의 바다, 고통의 바다 끝에 남은 것은 가느다란 희망 뿐입니다. 살아있는 자가 원하는만큼 끝없이 자고 나면 일어날 일 밖에 없듯이.
세상에는 고통을 인정하고 끌어안고 살면서 그 누구보다 조용히 가늘고 길게, 덤덤하고 강인하게 살아내는 이들이 있고, 또 한편에는 크게 기대하고 기뻐하고, 크게 절망하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이미 도처에 널린 고통이 고통인줄도 모르고 외면하며 살면서, 언제나 삶이 줄 작은 쾌락의 선물들을 기대하면서 부푼 기대를 안고 삽니다. 죽음에 대한 고통, 상실에 대한 고통을 외면하고, 환상 속에서 작은 쾌락에 만족하며 언젠가는 닥칠 지 모를 삶의 한계의 순간과 커다란 고통과 비극을 요리조리 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도철학은 괴로움에 대한 직시로부터 시작합니다.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괴롭고, 성취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상실하게 되므로 괴로운 구조가 진실이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도,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태어나서는 늙고 병들며, 죽어야 하기에 괴롭다. 환희와 절망, 사랑과 미움이 한 쌍이라는 것을 모르며 다시 또 집착하고 다른 욕망을 낳고 업을 일으키며 윤회하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끝없는 괴로움의 굴레이다. 욕망의 굴레 안에서 끝없이 생사를 반복하는 존재, 이것이 괴로움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고통의 진실을 보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우리 보통의 사람들입니다.
인도철학은 인간의 삶을 이렇게 자각할 수 있다면 생과 사의 드라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행을 통해 해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인도인의 인생관이자 세계관입니다. 요가는 바로 이런 인식과 함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탈을 목적으로 생겨난 수행법입니다. 불교 또한 이런 인도철학의 풍토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비슷한 단어들이 많고, 같은 목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인도철학과 불교의 목적은 같습니다. 괴로움의 소멸, 해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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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컬하게도 인도철학은 염세주의나 비관주의가 아니라 낙관주의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이 괴로운 윤회로부터의 자유, 해탈의 행복을 누리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인생관을 결코 비관적이거나 절망적이거나 체념적인 인생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수행터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그곳에 머무는 수행자들, 스님들의 얼굴이 얼마나 밝고 낙관적인지, 수행터를 안정시키기 위해 얼마나 즐겁게 할 일을 해내고 계신지 모릅니다. 삶에 이익이 되는 바른 수행을 함께 나누기 위해 맛있는 밥도 해주시고, 따뜻한 잠자리도 만들어주시고, 농사도 지어주시고, 꽃도 심어주십니다. 수행할 시간을 쪼개어가며 바쁘게 움직이십니다.
어찌 이런 사람들이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우울하게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이고 누구보다 목적을 가지고 즐겁게 삽니다. 가야할 길이 분명하고, 목적이 있고, 바른 가르침의 기준을 의심 없이 가슴에 품고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활기차고, 밝고 희망적입니다. 저는 그것을 매번 목격합니다.
이것이 한강작가가 지닌 가느다란 희망을 줄기차게 이어가는 그 어떤 힘과 닮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무엇이 이익이 되는 것인지 바른 것인지, 내적 기준 없이 끝없이 불만족을 안고 욕망의 바다를 헤매이느라 근심 걱정이 가득한 세속의 우리들의 얼굴보다 편안하고 밝고, 삶도 리드미컬하고 간결하고 산뜻해보입니다.
망설임과 혼돈의 선택지를 없애고 해야할 일에만 자신을 쏟아부어 정성을 다 해 몰두하는 삶이란 참으로 동경해야 할 삶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선택지들이 펼쳐져 있습니까? 그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혹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까?
또 다시 인도철학 이야기를 해봅시다.
불교에서는 바로 출가하는 것을 권유하지만, 본래 인도에서는 아슈라마라고 하는 해탈을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단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학생기는 부모 슬하를 떠나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는 시기입니다. 가주기는 결혼하여 자식을 생산하며 세속에서 신성한 의무를 다 하는 시기입니다. 임서기는 세속의 의무를 마친 이들이 사회적 삶으로부터 은퇴하는 시기로서, 숲으로 들어가 은둔하며 수행하며 머물고, 더 이상 세속의 욕망과 쾌락에 물들지 않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마지막 유행기는 세속의 욕망을 완전히 떠나 홀로 떠돌아 다니다가 육신을 버리는 시기입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미 죽은 자나 다름 없습니다.
가끔 불교 명상 수행을 하러 수행처에 들어가있기도 한데, 수행처에 가 보면 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젊은이들은 별로 없고, 자녀를 다 키우고 자유로워지신 어머님들이나 은퇴하신 아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인도철학에서 제시한 아슈라마라는 삶의 단계가 떠오릅니다. 과거 인도에서는 특별한 사람만 네 단계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권유되는 지침이었습니다.
불교는 학생기에서 가주기를 생략하고 바로 임서기로 넘어가는 형태로 출가를 제시하고 있어 세속의 의무를 내려놓고 젊을 때부터 집중적으로 수행을 할 수 있지만, 재가 수행자들은 가주기를 거친 임서기 즈음의 삶의 시기나 되어야 홀가분하게 수행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유인 것 같습니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임서기에서 집중수행을 하는 분들의 놀라운 성장을 보면서 '아, 나에게도 사회적 의무를 다 하면 때가 오겠지. 열심히 잘 나누면서 때를 기다리자. 이 시기에 바쁘게 사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이자. 수행의 차도에 대해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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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난에 찌든 어떤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광야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난데없이 미친 코끼리가 그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한참을 정신 없이 달렸지만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사나운 코끼리는 그를 한 입에 삼킬 듯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보였다. 그곳은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기진맥진한 채 그곳에 도착하였지만 그 나무는 새들조차 날아올라 갈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거대한 나무둥치는 잡을 수조차 없앴다. 그런데 나무 밑에는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는 마침 칡넝쿨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안도하며 칡넝쿨을 타고 우물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 오래된 우물바닥에는 전갈들이 쉬잇 쉬잇 소리를 내며 빨간색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제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힘은 점점 빠져들었다. 우물 벽면에라도 몸을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사면에서는 독사들이 잔뜩 독이 올라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의 목숨은 오로지 칡넝쿨에 달려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설상가상 어디선가 흰쥐와 검은 쥐가 나와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 그것은 위기였고 절망이었다. 이제 바야흐로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러는 동안 미친 코끼리는 우물을 가로질러 서있는 보리수나무를 머리로 쳐 받았다. 그러자 나무에 매달려 있던 벌집이 흔들렸고, 벌떼들은 이 가엾은 사나이를 마구 쏘아댔다. 그러는 사이, 한 방울의 꿀이 우연히 그의 머리 위에 떨어져 얼굴을 타고 내려와 입술에 닿으면서 그에게 찰나의 감미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일찍이 맛보지 못한 달콤함이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꿀맛에 도취되자 그는 탐욕에 사로잡힌 채 마침내 코끼리도, 전갈도, 뱀도, 쥐도, 우물에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p.2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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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화는 불교의 <비유경>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불교 고유의 것은 아니고, 그 전에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도 나오며, 7세기 자이나교에도 유사한 이야기들을 통해 인도철학의 진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발가벗겨 놓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과 무지함을 비판하는 것으로 광야를 헤매는 나그네는 미망에 빠진 우리 자신, 죽음으로 향하고 있으면서도 감각적 쾌락에 도취되어 그것을 잊고 사는 인간들, 미친 코끼는 무상(죽음), 우물은 우리의 삶, 전갈은 죽음의 그림자, 독사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 요소, 칡넝쿨은 생명의 줄, 쥐는 생을 갉아먹는 낮과 밤, 벌떼는 번뇌, 꿀은 5욕락을 뜻합니다. 보리수나무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자, 그러면 이쯤해서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강 작가처럼, 인도철학의 이야기를 각성으로 삼아 삶이 고통이라는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삶이 괴로움이라는 진실에 적극 동의할 준비가 되었는가? 요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고대부터 적극적으로 제시된 삶의 실천 철학입니다. 너무 좋은 방법들이 이미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그제서야 금계와 권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요가의 8단계가 왜 필요한지, 무엇을 위한 단계인지, 그 끝이 왜 해탈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아사나는 그 안에 포함되어있는 훈련 중 하나이며, 그 후에도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슷해 보여도 진실과 목적을 의심 없이 분명히 알고 가는 자의 수련의 질과 그 끝은 다를 것 입니다.
얼마 전 들었던 진경스님의 법문 중에는 성숙한 사람은 8풍(이익, 손해, 명성, 악명, 칭송, 비난, 즐거움, 괴로움)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설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떤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 성숙한 사람은 인과를 알기 때문에 변명 없이 업의 과보가 끝날 때까지 인내로 견딥니다. 여기에는 정진이 포함됩니다. 그들의 나타남은 평온과 받아들임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한강 작가는 수상 이후 쏟아지는 명성과 칭송, 즐거움이라는 8풍의 요소에도 흔들림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 기준에서 성숙한 사람입니다.
나의 요가가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성숙한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젊은 친구들은 체력도 좋습니다. 아사나도 열심히 합니다. 아사나의 수준도 높아졌습니다. 그런 노력이 육체적인 단련에서 끝나지 않고 정신적인 성숙함, 인내와 정진의 태도까지 이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 보석같은 수련의 힘을 모아 더 큰 목적을 이루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그렇게 이어가면 가는 동안에도 삶에 많은 이익이 있을 것 입니다.
글쓰기는 늘 저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을 통해 낱낱이 제 안의 진실을 뱉어내며 가고자 하는 길을 정리하고, 지금의 저를 인식하고, 어떤 길로 변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결심하기 때문에 가끔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괴롭기도 합니다. 당장은 괴롭지만 필요한 일이고 이 또한 저를 해방시켜줄 수행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모든 이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좋은 길벗을 만나시기를.
어지러운 세상에서 바르고 이익이 되는 아름다운 요가 수련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시기를!
Namaste
-언와인드 요가 클럽 발행인 김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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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와인드 요가
kjh8618@gmail.com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684 2F (연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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