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라는 것은 고요하게 안으로 집중할 때, 내면을 바라볼 여유와 시간이 넉넉할 때 저절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에게는 홀로 틀어박히는 시간이 필수적일 것입니다. 안으로 향하지 않을 때 억지로 쥐어 짜내서 쓰는 글은 스스로 빈 껍데기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매 달 저에게는 안으로 향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수업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수련을 하거나 침묵 속에서 홀로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12월이라는 달은 일년 내내 몰아두었던 약속을 한 번에 지키는 달처럼 내내 밖으로 나와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 동안 못 보았던 얼굴들을 한꺼번에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배불리 먹는 날이 많아지면서 쓰고 싶은 욕구는 줄어드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가끔의 이런 날들이 필요하기도 하고 나쁘지는 않지만, 스스로 뉴스레터를 쓰기 시작하면서 완벽하기 보다는 지속하자고 약속을 했던 터라, 말 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이야기하고 싶은 소재가 없으면 마음이 바삐 종종 걸음을 하게 됩니다.
억지로 소재를 찾아 빈 껍데기 같은 글을 쓰느니 '솔직하게 이런 상황과 마음을 편하게 이야기해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니 글이 써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주에서 서울로 온 지 이제 6개월 정도가 되었습니다. 글의 시작에 언급한 법정 스님의 '어느 길을 갈 것인가'를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온 것은 오르막길 일까, 내리막길 일까?' 제주에서의 삶을 생각해 보면 참 평온하고 무탈했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집 주변을 도는 것을 천천히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매일 밤 무수하게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감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늘 동경하던 시인 '메리 올리버( Mary Oliver)'가 된 듯 대자연의 충만함과 고요함 속에 나 자신에 관한 것과 삶의 많은 것들을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혹은 애써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포기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젊은 날의 치기로 밀어붙이던 것들에 대한 미련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장점과 맞바꾸어 가며 다른 이가 되고자 했던 어리석음은 서서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했고 곁에 있는 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관조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 전보다 많이 편안해졌고요. 인생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었을테죠.
제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 우연히 추사 김정희가 귀향 보내졌던 곳을 홀로 가게 되었는데, 추사체가 유배 생활 동안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던 곳은 매우 쓸쓸해보였지만 제주에 직접 살아보니 고립된 지형으로 한편으로는 무한한 단련을 할 수 있는 성실한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떤 것이 고요하게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하면 삶은 그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 날 그 순간, 저에게 주어진 이 시간도 비슷한 것이라고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전처럼 무엇이 되고자 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도시처럼 할 것이 많지 않았던 제주 시골에서의 일 년 반 동안 성실하게 하타요가 수련과 명상에 임했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과 길이 만들어져 갔습니다. 그간 우리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무탈하게 요가원 수업과 운영도 성실하게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일 년 반이 흘렀고 제가 먼저 서울에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터전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상식적으로는 이런 마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자연스러운 시기에 찾아온 생의 갈림길이었을까요? 제주에서의 삶은 많은 것들을 안겨주었지만, 왠지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삶이 너무 고단하고 혼잡해서 고요한 곳으로 수련을 하겠다고 떠나왔지만 이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내가 떠나왔던 곳인 것만 같았습니다. 도시에 대한 미움도 더 이상은 없었고, 그렇다고 또 제주가 딱히 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삶에 대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걱정 없이 편안했지만, 법정 스님의 글처럼 뻐근한 삶의 저항도 없었고 창조에 대한 의욕도 생겨나질 않았습니다. 매일 그저 똑같이 편안하고 편안한 하루 하루였습니다. 동네 젊은이들도 제법 모였고, 그저 지금처럼 매일 요가원을 운영하면 될 터 였습니다. 모든 게 평탄했고 바라던 대로 되었는데, 그것이 종종 지루하게 느껴졌고 아직 젊은 날에 리드미컬하게 부딪혀가면서 성장하며 살지 않고 있는 것에 스스로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주에도 열심히 부딪혀가며 성장하는 젊은이들이 대다수 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저는 너무 평온한 자연 속에 있으면 자꾸만 게을러졌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거듭 다시 태어난다는 법정 스님의 말에 저는 깊게 공감합니다. 이렇게 생겨 먹은 인간인 것도 제주에서 제대로 알게 되었죠. 생의 뻐근함을 좋아하는 인간, 어려움을 통해 거듭 깨닫고 다시 태어나고 강인하고 지혜로워지고 싶어하는 인간, 살아있을 땐 살아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싶은 인간. 혹은 그저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생의 리듬일 수도 있겠지요. 어느 순간 또 고요하게 지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지금의 선택이 좋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평화로운 시골 마을과 터전, 다정한 이웃들을 포기하고 기어이 서울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주 어렵게 이사한 짐을 다시 어렵게 육지로 올리고, 당시 우리 둘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여러 번 집과 요가원을 구하느라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흘린 땀과 눈물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지금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평온함을 떨치고 다시 올라오길 잘했어.'라고 이야기를 나누며 이제는 서로 웃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또 어려움이 오면, '아! 뻐근하다!' 하겠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이러려고 서울 왔지?'하며 조금은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요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길 더더욱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가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수업할 때와 자신의 삶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감 때문에 시작 초반에는 굉장히 부딪힘이 많습니다. 몇 번이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요. 스스로의 정직함과 성실함에 대해서 자문하게 될 것이고, 사실은 그 점이 끊임없이 나를 성장시키는 부분입니다. 세속에 살던 젊은이가 요가 선생님으로 발을 들일 때, 처음에는 절제하고 고쳐 나가야 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괴로운 시간들이 많을 것 입니다. 결국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전히 자격미달이라고 느낄 때도 있고,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 괴로운 시간들 덕에 분명 지금도 달라지고 있고, 많이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그 사이 아마 여러 번 다시 내리막길을 선택했던 적도 많았을 것 입니다. 미성숙한 선택들, 자기 파괴적인 습관들을 버려야 할 것이라고 인정하고 하나씩 포기해나가는 일은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마치 내 살점 같고, 커다란 쾌락이자 기쁨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것들과 이별할 때의 저항력이 엄청나죠. 나에게 해를 입히고 괴롭게하지만 만나면 즐거워서 헤어질 수 없는 연인처럼 내 안에서 끈질기게 떨어져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가를 직업으로 선택하고 나서부터는 스스로에게 생활의 규칙을 주고 다스리며 바꿔나가고 있는데, 이가 다 썪어가면서도 사탕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이에게 사탕을 내려놓게 하고 하루 세 번 꼬박 깨끗하게 양치를 하게 하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의 반항도 엄청나죠. 지금도 여전히 실수를 반복하는 고단하고 지난한 과정이지만, 이제 제 양심은 압니다. 어떤 것이 오르막길인지. 스스로를 성숙하게 길들이는 과정 안에서 조금씩 맛 본 깊은 행복 때문에 훗날에는 그 달라짐이 아주 마음에 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전에 한 정신과 전문의는 자신의 책이 하루 아침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평범했던 병원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서, 왠지 책처럼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부담감에 짓눌려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그렇다면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보지 뭐', 라고 결심했답니다. 그 결심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에너지가 커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회가 왔을 때, 본래의 안락함과 안주함의 편을 들어주기보다는 성장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인간의 길이자 오르막길을 통해 꼭대기에 이르는 길 아닐까요? 시에서 법정 스님이 언급한 꼭대기는 단순한 야망이나 욕심과는 달리, 인간의 내적, 질적 성장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꼭대기 일 것 입니다.
글 초반에 언급했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대한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 다시 온 것도, 요가 안내자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모두 저에게는 뻐근하고 부담스럽지만,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삶의 의지를 만드는 아름다운 오르막길 입니다. "왜 다시 서울에 오셨어요?" 라는 질문을 참 많이도 받았는데, 2022년의 끝에서 스스로 진지하게 답해 볼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역시 글쓰기는 이렇게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