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wind Yoga KLUB
<몰입 'devotion' >
월간 요가 클럽 vol.8 / JUNE.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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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옮길 때마다 나는 너무나 큰 슬픔을 느낀다. 추억이나 고통, 즐거움이 있던 곳을 떠날 때
그 슬픔이 더 크지는 않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출렁이는
단지 속 액체처럼 이동 자체가 날 흔든다.
-이탈로 스베보,<에세이와 흐트러진 페이지>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이라는 책의 서두에 적힌 이탈로 스베보의 문장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정확히 어떤 나라에 사는 지 왜 이 곳에 머물게 되었는지, 그녀의 이름은 무엇인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읽으면서 제 3자로 그녀를 관찰하기 보다는 함께 그녀의 내면에 머물게 되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공감하게 된다. 길에서, 사무실에서, 봄에, 광장에서, 서점에서 등으로 이동하는 46개의 물리적인 공간과 마음 속 공간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나라가 아닌 곳에 살면서 불안한 정체성과 이동하는 존재의 기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사색하고 묻는다. 다른 나라에 사는 이방인의 불안한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코로나 이후 첫 해외 여행을 다녀오고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이 책 속의 단편 '휴가지에서'라는 글이었다.
'조용한 호텔, 맛있는 아침 식사, 정오까지 비어 있는 수영장. 작은 흠이 하나 있다면 이곳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이 하는 걸 해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 ~꼭대기 레스토랑에 대해 흥분해 얘기한다. 하지만 난 기분이 내키지 않아 잠을 더 자다가 깨끗한 공기와 아이들이 뛰어들기 전의 조용한 수영을 즐기는 편을 택한다. ~현명하고 고집도 샜던 것 같은 나의 아버지는 여행 가방을 싸고 얼마간 낯선 장소에서 적응하느라 애쓰느니 집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평화는 집 안에서, 자신의 유일한 은신처인 익숙한 곳에서 가만히 있는 거였다. ~나의 어머니는 여행하고 휴양지에서 쉬고 싶어 했다. ~난 두 분 가운데 누구를 닮았을까? 나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싶어했을 아버지를 닮았을까? 아니면 밖에 나가 춤을 추고 싶어 했을 어머니를 닮았을까?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와는 달리 사람들과 즐기는 걸 좋아했을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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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 '새로운 사람과 장면, 놀라움, 경이로움, 신나는, 즉흥적인 기쁨, 이색적인 장소'... 책 속에서 나타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진 여행에 대한 상반된 측면의 느낌이다. 아빠가 느꼈을 여행에 대한 단상은 전자일 것이고, 엄마가 느꼈을 여행에 대한 단상은 후자일 것이다. 나는 누구를 닮았을까? 나이가 들어 그런지, 오랜만에 떠난 여행이라 그런 지 예전에는 후자가 강했으나, 이번 여행에서는 어쩐지 전자의 느낌이 더 강했다.
6일 동안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겨다닌 덕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또 낯선 장소로 떠났고, 한 곳을 충분히 알고 즐기기도 전에 떠나야만 했다. 그런 것들은 나에게 슬픔과 혼란으로 다가왔고 외부 세계의 자극보다는 내부 세계와의 연결과 안정이 더 중요한 가치로 바뀐 까닭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하는 것, 자신을 새롭게 바라볼 시간이 주어지는 것, 다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삶의 모습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주인공이 느끼는 여행에 대한 양면성을 나도 똑같이 느꼈다. 나는 누구를 닮았을까? 질문하며 아빠와 엄마 하나로 나눌 수 없었다. 여행 끝에 책을 다시 읽으며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런대로 내버려두어도 괜찮다고 위안을 얻는다. 자신이 낯섦이 주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더 선호하는지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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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치앙마이 숙소 한 곳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가 비치되어 있어서 수영 중간 중간에 조금 읽었는데, '이사 그라피티(1)'라는 단편이 흥미로웠다.
'나는 이사를 무척 좋아한다. 짐을 꾸려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다니노라면 정말이지 행복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활동적인 인간인가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반대로, 생활습관을 바꾸거나 세상일에 대한 가치판단을 변경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사만은 좋아한다. 이사의 미덕은 모든 것을 '제로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과의 교제, 인간관계,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들, 그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말끔히 소멸해버린다. 이때 맛보는 쾌감은 한번 익히고 나면 평생 잊을 수 없다. ~나는 지금껏 꽤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며 수많은 동네에 살았고,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제로화'해버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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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속에서 여행과 이사는 비슷해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숙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도 짧은 여행보다는 2년 터울의 이사를 즐기는 편인 것 같다. 잡다했던 물건들을 한 번에 소멸해버릴 수 있는 점, 물건을 다 드러낸 상태에서 구석 구석 새집을 대청소할 수 있으며 깨끗한 마음으로 물건을 하나 하나 배치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점, 그래서 나는 2년 마다 이사다니는 걸 매우 기뻐했다. 2년 동안 여행하듯 새로운 곳에 슬슬 적응하며 느리게 알아가는 기쁨이 컸던 것이다. 물건과 관계, 구석 구석 대청소에 대한 무게가 무거워질 때 쯤이면 전부 다 리셋해버리고 싶어진다. 나는 여행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여행 주기가 이사처럼 1, 2년 즈음이 되어야 하는 느린 사람일수도. 두 책을 통해 6일의 짧은 여행은 힘겨울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밴쿠버에서의 1년 살이, 제주에서의 1년 반 살이 모두 여행처럼 즐거웠다. 모든 걸 리셋하기에 적절한 시간이었다. 마치 그곳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이 신나다가도 1년이 지나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마음도 반복을 통해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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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에 실린 여행과 이사에 대한 단상을 통해 나는 자신의 마음과 조금 더 가까워진다. 소설과 에세이는 이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 뿐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낀 채로 어떤 타입으로 결론 짓기보다는 자신 안의 여러 가지 복잡성과 다양성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인 내면의 복잡성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게 된다. 소설처럼 타인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이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 패턴을 다시 형성한다. 우리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더욱 통찰력 있고 개방적이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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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에서는 '소설의 수난 시대' 챕터를 따로 다루면서 바로 이 공감력 부분에 대해서 다룬다.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낸다라는 연구 결과를 밝힌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을 때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면서 내면을 향해 엄청난 주의를 쏟는다고.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고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동기, 목표를 이해하려 애쓰고, 그런 다양한 요소를 따라가려 노력한다고. 그것은 일종의 공감 연습에 가깝다고 말한다. 또한 소셜미디어가 그것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은 복잡하기 때문이며, 세상을 제대로 고찰하려면 보통은 긴 시간 동안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길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말할 가치가 있는 내용 중 280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 토막 난 파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는 무언가에 오랜 시간 집중할 때만큼 공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를 장악한 단절된 비명과 분노의 파편에 하루에 몇 시간씩 노출되면 우리의 사고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는 더 상스럽고 시끄러워질 것이며,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에 전만큼 귀 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내가 굳이 한 달에 한 번은 뉴스레터라는 긴 글을 써서 함께 읽으려 하는 이유도 그런 부분이다. 소셜미디어에도 나는 최대한 파편화된 이야기보다는 장편 소설과 드라마를 만들 듯 나와 요가원을 매개체로 연결된 이야기를 이어보려하고 함께 내면을 바라보게 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그래도 짧다. 글자 수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내 사고 패턴의 깊이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뉴스레터를 쓰면서 한 달에 한 번은 깊이 몰입하고 숙고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나누려고 하면 요즘의 삶에 파편화되어 있던 생각들을 모아 한번 더 깊이 성찰하게 된다.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파편화된 사진들과 짧은 글만으로는 여행과 이사에 대해서 이런 깊이까지 절대 다다를 수가 없다.
또 월간뉴스레터 덕에 한 달에 한 번은 3시간 이상 휴대폰을 보지 않고 원고에 집중할 수 있는 몰입의 시간이 주어진다.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나는 더더욱 그것을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기로 했다. 어제는 원고를 날리는 사고가 생겨서 맥이 빠졌지만, 그 순간도 선물이라 생각하면 다시 못 쓸 것도 없었다. 어제의 원고와 오늘의 원고는 로보트가 아니기에 거의 90%이상 달라지긴 했지만, 그 덕분에 나는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하며 다듬어진 원고를 쓰며 몰입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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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 2장에서는 '몰입의 손상'에 대해 다루는데, 비상한 집중력을 '흐름에 올라탔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했다. 다 끝나서 기분이 좋지만 사실은 영원히 오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암벽 등반가의 말은 인상적이다. 그만큼 자신이 흐름 속에 있을 때 기쁨을 느끼고 그 흐름이란 정상이나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 안에 머물면서 계속 흐르는 것, 그 흐름을 지속하기 위해 위로 오르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몰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몰입은 하고 있는 일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모든 자야 감각을 잃은 상태, 시간이 사라진 듯한 상태, 경험 그 자체의 흐름을 탄 상태를 뜻한다. 몰입은 우리가 아는 것 중 가장 깊은 형태의 집중 상태이다. 우리는 어떻게 몰입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몰입 상태가 되려면 단일한 목표를 택해야 하고, 그 목표가 자신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능력의 한계까지 스스로 밀어붙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해서 몰입에 바져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몰입한 사람은 자신이 오로지 현재에 머무는 기분을 느낀다. 자아가 소멸해 목표와 내가 하나 되는 느낌. 우리는 요가를 할 때 종종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안내를 하면서도 그렇게 수련을 하는 사람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몰입에 굶주린 사람은 일부만 남아 자신이 집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끊임없이 산만하고 짜증나고 약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안내자는 그 사람에게 맞는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잡아서 몰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만해지는 사람이 있으면 몰입을 위해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준다. 우리의 내면에는 오랜 시간 집중하고 그 상태를 즐길 힘이 있으며, 그 힘이 흐를 수 있는 적절한 환경만 갖춰진다면 우리가 더욱 행복하고 건강해지리라는 통찰을 잊어서는 안된다. 책에서는 주의력을 되찾으려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몰입의 원천으로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몰입은 집중력의 잠긴 물을 열어준다. 저자는 오랫동안 몰입을 연구한 미하이를 인터뷰했는데, 80대 후반의 그는 '삶을 돌아봤을 때 최고의 경험은, 산맥을 오르던 때에 한 것이었어요. 산을 오르면서 정말로 어렵고 위험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일을 했을 때의 경험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죽음을 향해 갈 때 '좋아요'나 리트윗 같은 강화요인들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몰입을 경험한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알피니스트'의 암벽 등반가가 떠오른다. 그는 지금 죽고 없지만, 왜 어떤 명성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 맨 손으로 산에 오르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산에 다녀오면 어떤 상태의 기분에 휩싸이는데, 내려와서도 한동안 지속돼요.” 아마 그것은 계속 현존하고 흐르고 있는 몰입의 상태에 흐름을 탔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ADHD 진단을 받았던 그가 산에 오르면서 몰입을 느꼈고, 그는 그저 그 상태가 즐겁고 좋았다. 그의 삶에 대해 누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현대 사회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감금된 아이들의 ADHD 진단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어린아이들의 욕구를 받아주지 못하게 된 현실의 환경에 마음이 아파온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사회적인 시스템과 구조, 실리콘밸리의 윤리적인 이윤 추구 등에 있다고 꼬집는다. 우리아이가 ADHD 진단을 받은 것은 부모와 아이만의 문제이며, 성인들이 어떤 것 하나에 몰입하지 못하고 능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자신만의 책임이라기 보다 더 거대한 세력과 배후가 있다는 것을 전세계를 돌며 수백명을 인터뷰한 결과 밝힐 수 있었다.
'나는 집중력 저하가 주로 나나, 여러분이나, 여러분 자녀의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를 찾아냈다. 모두가 공격을 받고 있다. 우리를 공격하는 세력은 매우 강하다. 그러한 세력 중에는 거대 테크 기업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업을 훨씬 뛰어넘는다. 진실은 전 세계의 집중력이 타들어가는 와중에 우리는 자신을 탓하고 자기 습관을 바꾸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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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이라는 것이 한 인간의 얼마나 아름다운 능력인가를 알게 한 패티스미스의 <몰입>이라는 책에서 그녀는 영감을 따라 헌신에 가까운 몰입의 즐거움과 기쁨을 경험한다. <몰입>의 원제이기도 한 'Devotion'이라는 단어는 형태가 정해진 유일신을 향한 숭배가 아니라 신심에 가까워질 만큼 순수한 몰입과 헌신의 경지에 드리고 바치는 마음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이 책에서 '글을 쓴다'는 행위는 우리가 눈앞을 알 수 없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고 읽고 보고 생각하는 과정의 치열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Devotion이 없는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어서 사람은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글을 쓰는 거라고 패티 스미스는 말한다.
여러분은 이런 몰입(devotion)의 기쁨이 있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
몇 분에 한 번씩 휴대폰의 좋아요를 들여다보며 삶의 기쁨인 몰입과 집중력을 도둑맞고 계신가요?
저는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나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집중력을 찾아오기 위한 방법을 숙고하게 됩니다. 저는 회사 다닐 때보다는 몰입을 조절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산에 갈 때도, 자전거를 탈 때도, 요가를 할 때도 휴대폰을 놓고 지냅니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게도 원한다면 쉴 새 없이 집중력을 도둑맞지 않아도 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떠나올 때는 불안했지만,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좋은 경험을 하고 있는 시간 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협업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졌을 때의 상황도 알기에, 그런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조절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안에서도 조금은 조절할 수 있는 틈과 힘을 주지 않을까해서 공유합니다.
산에 오르며 경치를 감사할 때, 요가를 할 때나, 달리기를 할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가족과 밥을 먹을 때, 산책을 할 때, 자전거를 탈 때 등은 충분히 원한다면 몰입할 수 있도록 습관처럼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갈수록 우리의 집중력을 도둑질하기 위한 노력은 더 거대해질 것이므로 모두 의식적으로 하루 안에 몰입의 즐거움을 조금씩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라며, 응원을 보냅니다.
모두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shanti !
참고 도서 및 다큐멘터리 : 줌파 라히리<내가 있는곳>, 요한 하리<도둑맞은 집중력>, 패티 스미스<몰입>, Netflix 다큐멘터리 <알피니스트>
-2023.6. '월간 요가 클럽' 발행인 김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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